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눔터 최근글

더보기


목장나눔터 최근글

더보기
나눔터
조회 수 5445 추천 수 0 댓글 0

바울과 가정 교회

홍인규(천안대 신약학 교수)

들어가는 말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에베소 교회를 언급하여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모이는 교회(su;n th/' kat j oi\kon aujtw'n ejkklhsiva/)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기록한다(고전 16:19). 2-3년 후에 로마에 편지를 쓰면서, 또한 바울은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또 저희 집에 모이는 교회(th;n kat j oi\kon aujtw'n ejkklhsivan)에게도 문안하라”고 말한다( 16:3, 5). 3차 전도 여행이 끝나고 감옥에서 바울은 친구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는 편지 서두에서 빌레몬, 그의 아내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모이는 교회(th/' kat j oi\kovn sou ejkklhsiva/)”에게 인사한다( 2). 마지막으로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모이는 교회(th;n kat j oi\kon aujth'" ejkklhsivan)에 문안하라”고 말한다( 4:15). 
이상의 인사에서 바울은 가정 교회 곧 개인의 가정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모두 가정 교회이다. 가정 교회는 2세기 중엽 이후에 조금씩 변화를 경험하지만,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어(313) 바실리카(basilica)라는 직사각형 교회당이 세워지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교회 형태이었다. 
가정 교회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교회의 원형(original form)과 본질의 문제로 인도한다. 가정 교회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본질에서 이탈한 점이 많다. 한국 교회도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다가 근본적인 것을 많이 상실하였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는 대형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의 상실과 대다수의 성도들이 예배의 수동적인 관람자로 전락된 것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형 교회에 대해 점점 회의를 느끼고, 개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1)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교회 설립, (2) 가정 교회의 사회적 상황, (3) 가정 교회의 통합 능력, (4) 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 그리고 (5) 가정 교회의 변천과 종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원형을 보게 되길 희망한다. 


1.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교회 설립 

바울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전 시대를 경험하였다. 이 왕조 시대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시대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카스피 해 남동쪽에 있는 파르티아(Parthia)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이 그러한 번영과 안정의 시작이었다. 
사도 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길리기아(Cilicia) 지방의 수도인 다소(Tarsus)에서 태어났다( 21:39; 22:3). 바울의 부모는 디아스포라 회당의 멤버이었고( 3:5), 다소의 시민권( 21:39)과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16:37-38; 22:25, 28). 이것은 바울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족에 속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스 문화의 중심인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코이네(Koine)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자기 서신에서 유대인의 성경을 인용할 때,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Septuagint)을 이용하였다. 그는 스토아 사상에 익숙하여 대중 철학(popular philosophy)에서 예(illustration)를 들기도 하였고, 디아트리베(diatribe) 스타일을 구사할 줄도 알았으며, 그리스-로마 수사학에도 정통하였다. 
바울의 생활 무대는 도시이었다. 그 당시 도시는 경제와 문화가 번영한 곳이었다. 이러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왕성하고, 직업에 대하여 유연성이 많고,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었다. 바울 자신이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많고 세계주의자(cosmopolitan)이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울은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경건한 부모을 따라 정기적으로 회당에 다녔다. 회당에서 바울은 유대교의 신앙과 생활 방식을 배웠다. 나중에 바울은 랍비가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바리새파 유대교를 연구하였다( 23:6; 3:5). 예루살렘에서의 정규적인 교육은 바울에게 율법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큰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 1:14; 3:5-6). 
조상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바울은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원시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다. 그는 다메섹(Damascus) 회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을 진멸하고자( 9:2, 19-20; 1:13),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은 갑작스럽게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 1:16; 고전 15:8). 이 환상은 바울에게 새로운 실존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바울은 단순히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환상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절 경험이었다(고전 15:8-9). 바울은 다른 부활의 증인들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았던 것이다(고전 15:5-11; 1:5). 소명을 받자마자 바울은 아라비아(나바티아 왕국)과 다메섹에서 독자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1:16-17). 그리고는 북 수리아(Syria)와 자기 고향 길리기아에서( 1:21)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초기 사역은 특별한 성공을 거둔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원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 소속되었으나, 자신들을 회당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개인 집에서 교회로 모이면서 이방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하였다( 11:19-20).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면서, 적극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동참하였다. 1차 선교 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Cyprus)섬의 살라미와 바보에서,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2
차 선교 여행은 바울이 바나바와 분리하여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바울은 마게도냐(Macedonia)로 건너가 빌립보(로마와 비잔티움을 연결한 주요한 도시)와 데살로니가(마게도냐의 수도)와 베뢰아에서 선교하였다. 그리고 아덴을 거쳐 고린도로 내려와, 고린도(국제적 무역 도시)에서 1 6개월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3차 선교 여행은 에베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에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교 사역을 통하여 바울은 초기 기독교인 1세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자기가 설립한 이방인 교회들에서 거둔 구제금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 체포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방문하기를 소원하였던 로마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60년대 초에 순교하였다(1 Clement 5). 
바울 당시 로마 제국에서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보편적인 일이었다. 특별히 상인들과 장인들이 많이 이동하였다.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의 보급, 로마의 도로 건설, 정치적 안정, 로마 군대의 보호로 인하여 여행은 쉽게 이루어졌다. 바울의 교회들은 대부분 주요 통상로(trade route)에 세워진 중요한 도시들에 설립되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바울은, 물고기가 물에서 놀듯이, 로마 제국의 도시들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보다 더 개방적이고 새로운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점도 바울이 도시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방문하는 도시마다 경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이나 구원의 길을 전하는 유랑 설교가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들의 겉모습은 아름답거나 아니면 너무 거칠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쉽게 끌었다. 그들은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특별하였다. 곧 가족없이 혼자 지내고, 무소유를 과시하고, 남의 경제적 도움으로 살았다. 또한 술이나 고기를 금하는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전이나 거룩한 장소나 야외에서 잠을 자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수사학에 능하여, 말로 군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이 연설할 때는 때때로 기적, 예언, 꿈의 해석, 그리고 엑스타시가 동반되었다. 
바울도 하나의 유랑 설교가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유랑 설교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바울은 힘이나 능력 보다는 연약함을 드러냈다(고전 2:3; 4:13-14). 과시하는 태도는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살전 2:7-8). 그는 말 보다 편지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cf. 고후 10:10). 바울도 검소하게 살았지만( 4:11-12), 금욕주의적인 삶을 영위하지는 않았다(고전 8; 10:26).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교인들 중의 한 사람의 집에서 거주하였다. 고린도인들이 볼 때, 바울의 웅변술은 뛰어나지 않았다(고전 2:1-5). 바울의 설교에도 표적과 기적이 동반되었지만( 15:19; 고후 12:12), 그는 그것들을 결코 자랑해 보이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청중에게 충격을 주려고 한 것은 자기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그는 자기가 전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인정되기 원하였다. 
바울의 야망은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하지 않은 곳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15:20). 그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전통적인 회당 스타일로 말하였다( 13:5, 14-16; 14:1). 바울은 또한 강당과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17:17; 19:9). 여행과 숙박 그리고 음식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밤낮으로 일하였다(살전 2:9). 교회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고후 11:7-12; 4:10-20). 바울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였다. 그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였다(고후 11:23-29). 그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가 되었다(고전 9:19-23). 바울의 좌우명은 자기 선전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에 그는 주 앞에 자기 교회와 함께 서기를 원하였다(고전 9:1-2; 고후 11:2). 교회에 대한 그의 사도적 관심은 부모의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4:12-20; 살전 2:7-12).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모두 개인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고‘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가정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삶은 평등과 형제 사랑에 근거하였다. 현대 교회의 심각한 병폐인 예배와 일상 생활의 분리는 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정이 예배의 처소요 신앙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앙과 삶은 쉽게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2.
가정 교회의 사회적 상황 

바울이 교회의 모임 장소로 개인의 가정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가정은 선교 기지(base), 지역 회중의 센터, 그리고 선교사들의 거처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가정은 그들의 종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었다. 가정은 특별히 외적 위협으로부터 자기 종교를 보전하는 마지막 보루이었다. 
고대 가족은 로마 제국에서 도시(polis)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었다. 가족은 보통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보험 역할을 하였다. 인생의 위기(사회적 몰락, , 노화, 전쟁, 자연적인 재앙 등)가 있을 때, 가족이 가장 큰 책임을 담당하였다. 국가의 복지 제도나 어떤 보험 회사도 가족을 대신해 주지는 못하였다. 로마 제국은, 비록 퇴역 군인이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기는 하였지만, 복지 국가는 아니었다. 
따라서 고대 가족은, 특별히 가족의 가장은, 법적, 사회적, 종교적인 일에서 상당한 독립을 향유하고 있었다. 이 독립성은 정부가 승인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책임에 따른 권리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것은, 가정은 종교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장소이었다는 점이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De domo sua에서 유명한 말을 하였다: “개인의 가정 보다 더 성스럽고 모든 종교에 의해 더 보호받는 것은 무엇인가? ... 가정 안에는 성스러운 사당(shrine), 예배, 그리고 제사(cult)가 결합되어 있다. 이 신전은 모두에게 너무 성스러워서, 여기로부터 누구를 떼어 놓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41.109). 
가정은 교회가 외부 권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체적인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가정 안에서 교회는 예배와 삶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중심으로한 여러 관계(개인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관계)의 네트워크(network)는 교회의 기초 구조로 이용되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가족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 중에서 신약 성경에 가장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교회는 고린도 교회이다.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는 가정 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그리스도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가(또는 브리스길라)를 만났다. 생업이 서로 같아, 바울은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8:1-3). 아굴라와 브리스가 집에서 모름지기 고린도의 첫 가정 교회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가정 교회는 디도 유스도 집에서 형성된 것 같다( 18:7).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선교 보조금을 가지고 와서,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에 매달리지 않고, 디도 유스도 집으로 옮겨 복음 증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 집은 회당 옆에 위치하여 바울에게 특별히 중요하였다. 1년 반 후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에베소에서도 한 가정 교회가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서 조직되어 모임을 가졌다( 18:18-19; 고전 16:19). 바울 다음에 아볼로가 고린도로 왔는데, 그도 틀림없이 바울이 사용하였던 방법을 채택하였을 것이다( 18:27-28). 곧 한 집에 집중하여, 그 집에서 가정 교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그 가정 교회가 특별히 아볼로에게 충성하였다(고전 1:12; 3:4-6). 고린도에는 다른 가정 교회들도 존재하였다. 가이오 집( 16:23; 고전 1:14)에서는 분명히 한 그룹이 모이고 있었고, 또한 회당장 그리스보 집( 18:8; 고전 1:14), 스데바나 집(고전 1:16; 16:15-16), 그리고 에라스도의 집( 16:23)에도 가정 교회가 모였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서 16장의 길다란 인사 목록을 보면, 우리는 로마에도 적어도 세개의 가정 교회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이고( 16:3, 5), 둘째는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의 교회이고( 16:14), 세번째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성도의 교회이다( 16:15; cf. 16:5, 10). 이름으로 판단하면, 첫번째 가정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이었으나, 다른 두 가정 교회는 주로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된 이방인 교회인 것 같다.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들이 존재하였다면, 여러 교회들은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고린도의 경우, 고린도전서 14:23에 ‘온 교회’(hJ ejkklhsiva o{lh)가 함께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서 16:23에도 고린도 교회를 언급하여 ‘온 교회’(o{lh hJ ejkklhsiva)의 모임 장소가 가이오 집이었다고 말한다. 여기 ‘온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모든 가정 교회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당시 도시에 사는 일반인의 집에는 적어도 10-20명 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아마도 처음 교회는 이러한 방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더 작은 그룹들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이 함께 예배하기를 원하면, 다른 집의 더 큰 방이나 안뜰(inner courtyard)에서 전체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온 교회’의 수는 고대 로마 집의 크기와 그리고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인물 정보를 고려할 때 약 50-100명 정도이었던 것 같다. ‘온 교회’의 회합은 아마도 자발적인 이교도의 모임들의 경우를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 가정 교회들은 서로 구분된 공동체를 형성하였지만, ‘온 교회’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작은 가정 교회들과 ‘온 교회’사이의 이러한 교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미 그것을 안디옥에서 경험하였다. 갈라디아서 2:11이하에 나타나는 안디옥 사건 당시, 안디옥에는 적어도 두개의 가정 교회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어떤 자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는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고보의 사람들이 도착하여, 베드로에게 모세의 음식법을 준수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나 유대인 그룹으로 이동하였다. 이것은 이방인 그룹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였다. 이 문제는 전체 모임(‘온 교회’)에서 논의되었다. 바울은 베드로를 ‘모든 자 앞에서’ 책망하였던 것이다( 2:14). 
가정 교회의 내적 구조(inner structure)는 당시 가족(household)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었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의 가족에는 직계 가족(immediate family)만이 아니라, 노예, 해방된 노예, 고용된 노동자, 동업자, 소작인(tenant), 가신(client) 등이 포함되었다. 교회의 집 주인은 가정 교회 안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자들은 남성 우월적인 외부 사회에서 보다는 가정에서 더 많은 독립을 누렸기 때문에, 가정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를 더 많이 향유하였다. 노예들은 일반적으로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지만,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가정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자신의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든지(심지어 노예일지라도) 환대를 받았다. 
그러면 교회 안에는 어떤 사회 계층이 있었는가?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교회는 역시 고린도 교회이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세가지 계급이 있었다. 상류 계급은 원로원 의원(senator)과 기사(knight)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로마 사회에서 수적으로 매우 작은 그룹이었다. 하류 계급은 재산이 없는 무산 계급으로, 수적으로 가장 큰 그룹이었다. 이 그룹은 도시나 농촌이나 광산에서 노동으로 생활해 가는 해방 노예나 노예로 구성되었다. 경제 발전과 도시화 과정을 통하여 중류 계급이 성장하였다. 중류 계급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도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이 유산 계급은 매매업자, 지주, 제조업자, 금융업자, 그리고 교사와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울의 메시지에 자신을 개방하였던 사람들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전통적인 로마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어서 접근이 어려웠다. 그런데 중류층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강해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가정 교회는 이러한 중류층 사람의 개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만약 유복한 사람이 자기 집을 가정 교회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지 않았다면, 가정 교회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비좁은 숙소에 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바울은 새로운 도시에 가면, 먼저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는 오랜 유대교 전통 때문에 반응이 미약하였다. 개종자(proselyte)들 중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들의 수는 회당에서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유대인의 노예이거나 유대인에게 결혼한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들의 경우에 상황은 달랐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할례와 율법의 의식법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여하는 이방인들이었다. 이들은 회당에서 수적으로 적지 않은 그룹을 형성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유대교인의 수준 높은 윤리, 그리고 유대교의 오랜 전통에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가족들과의 관계, 직업을 중심으로 한 관계, 그리고 다른 여러 사회적인 관계들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당시의 유대인 배척 운동(anti-Semitism)에 자신들을 완전히 노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단순히 회당의 준회원에 머물기를 원하였다. 그들 중에는 좋은 가문 출신이 많았다. 사회적 약자들(노동자, 노예, 여자 등)은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완전히 개종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들은 가족과 직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완전 개종이 어려웠다. 유대인들은 여러가지 이익 때문에 이방인의 회당 가입을 장려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회당에 상당한 기부를 하였고,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국가 권력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개종의 조건으로 할례와 유대교의 의식법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를 이방인에 대한 제한(restriction)이 없는 유대교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방인을 놓고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18:13을 보라). 이 경쟁에서 바울이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회당은 회원 수와 재정 수입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는 부유한 자들의 유입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린도전서 1:26-29에서 바울 자신도 처음부터 유력한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고 진술한다. 특별히 1:26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특권층에 속한 자가 많지는 아니하여도 존재하였다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그들의 수는 적어도 8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스데바나, 그리스보, 가이오, 에라스도, 아굴라, 브리스가, 디도 유스도, 소스데네 등이다(고전 1:14-16; 16:15-17; 16:1-2, 23; 18:2-3, 6-8, 17). 이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들이었다. 
바울 서신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있기 전에는, 바울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조직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 처음부터 가난한 자들과 함께 부유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가 거의 없다. 초기 가정 교회 안에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기독교의 계속적인 발전과 확장을 위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제 우리가 탐구하여야 할 일은, 그러한 다양한 구성원들이 가정 교회 안에서 어떻게 통합을 이루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3.
가정 교회의 통합 능력 

초기 가정 교회들은 주변 세계와 분명히 구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교회의 내부 일들을 사랑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였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종이나 직업이나 다른 사회적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졌다. 그 결과 여러 그룹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이제 중요한 일은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 일은 각 교인의 모든 삶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조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과의 분명한 단절과 계속되는 갈등을 동반한다. 그러면, 새로운 개종자는 무슨 유익을 얻기에 그러한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였는가? 
가장 중요한 소득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련의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교회들에게 새로운 성전, 신상(statue of a god), 또는 예배적인 드라마(cultic drama)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가 전한 것은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메시지이었다(고후 4:3-6). 이 메시지는 ‘복음’이라고 불리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모든 인류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석한 것이다(고전 15:1-11).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자체의 표현이다( 5:8-9).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창조한다.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그리고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을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로 만듬으로써 그 능력을 입증한다. 
청중으로부터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준 것이다. 바울의 교회들은 빌립보서 3:20-21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러한 확신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빌립보서 보다 더 늦게 기록된 베드로전서 1:3-4는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또한 터툴리안도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확신하는 믿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믿는 자가 된다”(De resurrectione 1). 이 부활의 소망은 재림에 대한 임박한 기대와 결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왔다고 믿었다( 13:11; 16:20; 고전 7:29-31; 16:22; 4:5).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의 생활 방식을 포기하고 기존 질서와의 계속되는 갈등을 능히 견뎌낼 수 있었다. 
기독교 개종자들의 또 다른 소득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과 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분리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집단적으로 ‘성도’( 1:7; 고전 1:2; 고후 1:1)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불리운다(살전 1:4; 고전 1:27). 그들은 하나님의 ‘아신바 된 자들’이고(고전 8:3; 4:9),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고전 1:9; 1:6; 5:8).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8:16, 21; 3:26).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부른다(‘형제들’은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보통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러나 ‘외인들’(고전 5:12-13 살전 4:12; 2:19)을 언급할 때에는 분리와 거리를 강조하는 용어들이 고용된다. 그것들은 ‘이방인,’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살전 4:5; 4:8), ‘소망이 없는 자들’(살전 4:13), ‘믿지 아니하는 자들’(고전 6:6), ‘불의한 자들’(고전 6:1, 9) 등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중요한 특징은 평등이다. 이것은 복음을 영접한 자들이 다양한 그룹과 여러 사회 계층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특별히 의미있다. 평등은 갈라디아서 3:27-28의 초대 교회 세례 의식적 고백문 안에 잘 표현되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cf. 고전 12:13; 3:11). 그리스도의 죽음에 믿음으로 동참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 사람이다. 이 변화는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서, 수세자들의 종말론적인 신분을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인간이 내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받을 것이다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된다( 24:7; 31:33-34; 36:26-27; 2:26-27; 3:1-2). 고대 사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안에는 더 이상 인종적, 신분적, 성적 구분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구든지 세례를 받고 동일한 성령을 부여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실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도 사실이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한 성령을 통하여’ 공동체 안으로 들어 왔으며(고전 12:13), ‘한 성령 안에서’ 동일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2:18), ‘동일한 성령에 의해’ 삶의 지도를 받는다( 5:25).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고전 12-14), 은사를 통하여 주의 영광스런 사역에 모두 참여하며, 또한 주의 만찬에도 동등한 자격으로 동참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도 특권을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의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고( 11:17),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이라 주장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복의 상속자가 되었다( 3:29; 4:16, 17). 노예도 더 이상 ‘종과 같지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다( 1:16; cf. 4:9). 또한 성의 차이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cf. 1:27).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자가 교회에서 예언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령과 세례는 교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평등을 창조하신 것이다. 실로, 가정 교회는 진정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화해의 공동체이었다. 
평등과 관련하여 바울의 주요 관심사는 교회의 하나됨이다. 내부에 서로 경쟁하는 그룹들이 존재하면 교회는 큰 위험에 빠진다. 그 존재는 생명력의 신호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표시이다(고전 1-4).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5:6). 구원과 상관없는 관습(, 음식과 날에 대한 관습)을 지키는 일은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14:1이하). 예배 중에 교인들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은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4:19; 15:2; 고전 8:1). 그들의 말은 모든 교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하고, 예배의 질서에 부합되어야 한다(고전 14).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화평( 15:33)과 마음의 일치(고전 1:10)이다. 
성령은 황홀경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 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은 사랑을 유발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의하면,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 여기서 ‘열매’라는 은유가 시사하듯이, 성령은 사랑의 보조자가 아니라, 사랑의 내적 원천이요 힘이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사랑의 능력을 공급하는가? 육체에 속한 자들은 정욕에 사로잡혀 온 통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 8:5). 이런 자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기 때문에”( 5:26), 그리스도의 낮아진 삶과 고난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란 미련한 것이다(고전 1:23).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고전 2:13).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cf. 5:5).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강력한 내적 열망을 창조하는데, 그것은 육체의 정욕에 복종하는 수치스런 삶을 단호히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서로 사랑의 종이 되면, 교회는 놀라운 통합을 이루게 된다. 


4.
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 

이제 우리는 평등과 하나됨의 공동체인 가정 교회의 공중 예배를 살펴 보고자 한다. 바울 서신에서 공중 예배 중에 발생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11-14장이다. 데이타는 단편적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초기 교회의 공중 예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성만찬의 오용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한 자리에(ejpi; to; aujtov) 함께 모여서”라고 시작한다(고전 11:20). 14:23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말하면서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14:23에는 ‘온 교회’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온 교회(hJ ejkklhsiva o{lh)가 한 자리에(ejpi; to; aujtov) 함께 모여서”(고전 14:23).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1-14장의 말씀이 ‘온 교회’의 모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 작은 가정 교회의 모임에만 해당되는 특별한 활동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작은 가정 교회의 모임과 ‘온 교회’의 모임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온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가? 먼저, 고린도전서 11:20이하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만찬은 가정 집에서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애찬(love feast) 중에 거행되었다(cf. 16:23). 고린도전서 11:20은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kuriako;n dei'pnon fagei'n(‘주의 만찬을 먹는 것’)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헬라어 dei'pnon(‘만찬’)은 보통 저녁에 먹는 정찬을 가리킨다(cf. 14:12; 13:4; 21:20). 또한 fagei'n(‘먹는 것’)도 보통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cf. 14:2; 고전 10:27; 10:8). 그리고 빵을 떼고 나누는 것도, 당시 유대인 가정에서 식사를 시작하는 일반적인 방법이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도 식사를 마치는 정상적인 순서이었다. 
식사의 특징은 시작과 끝에 기도가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식사가 언급되는 성경 어느 문맥에서도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나 또는 어떤 공식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식사의 경우처럼, 주의 만찬은 교회가 모이는 집의 남자 주인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은 주의 죽음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고전 11:24)는 말은 “이것은 너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나다”라는 의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고전 11:25)는 말은 ‘이것은 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세워진 새로운 관계이다”라는 의미이다. ‘몸’과 ‘피’는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고, ‘언약’이라는 용어는 그 죽음의 결과로 오는 놀라운 혜택,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런 새로운 관계를 상기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실제적으로 심화시켜 준다. 마치 가족이나 작은 그룹이 공동 식사에 참여함으로 그들 상호간의 유대 관계를 보여주며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6에서 예배 활동에 대하여 중요한 진술을 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cf. 고전 14:6). 여기에서 언급된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은 그 당시 공중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들이었다. 
‘찬송시’(yalmov")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유대인의 시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지은 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빌립보서 2:6-11과 골 1:15-20에 나타난 기독론적인 시들은 그리스도인의 찬송시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르치는 말씀’(didachv)은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말씀인데, 그것은 12:8-10의 은사 목록에 포함된 ‘지헤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관련되는 것 같다. ‘계시’(ajpokavluyi")는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말씀으로,‘예언’도 포함한다(cf. 14:6). 14:30에서 ‘계시가 있거든’(ajpokalufqh/')이 예언 분변의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profhteiva)의 목적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다(14:3). ‘방언’(glw'ssa)은 성령에 감동된 언어(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이다(14:13이하). ‘통역’(eJrmhneiva) 12:10에서 언급된 방언 통역이다. 방언은 통역이 된다면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14:13). 
이 외에도 고린도전서 14:15-16에는 다른 예배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것들은 ‘기도’(proseuvcomai),‘찬양’(yalw', eujlogevw), ‘감사’(eujcaristiva), 그리고 공동체의 반응인 ‘아멘’이다. 또한 16:22의 ‘마라나타’(‘우리 주님, 오시옵소서’)도 초기 종말론적인 기도로서, 당연히 예배 활동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예배 활동의 목표는, 14:26c(“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에 나타난 바와 같이, 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7에 나타난 은사의 목적과 부합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예배 중에 믿는 자들이 다양한 은사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f. 14:3).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cf. 고전 10:31-33).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덕이 세워지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유대인의 모임은 토라 중심이었다. , 성경 낭독, 강론, 신앙 고백 그리고 기도가 회당 예배의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헬라인의 종교 모임은 행진, , 극적인 의식 그리고 신성한 식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자기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세워주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예배 행위이었다. 외부인들의 눈에는, 초기 가정 교회의 모임은 종교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전, 신상, 제사장, 제사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어떤 신성한 장소 보다는 성도의 모임이 바로 성전이었고(고전 3:16-17), 성도 모두가 제사장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만들어진 건물 안이 아니라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5.
가정 교회의 변천과 종말 

바울의 교회들은 모두 하나도 예외없이 가정 교회이었다. 바울의 후기 서신이라 할 수 있는 목회 서신에 나타난 교회도 가정 교회이었다. 비록 목회 서신에는 교회 공동체가 ‘몸’으로 묘사된 곳이 없고, 은사의 중요성도 감소되고, 여자의 역할에도 좀 더 제한이 있고, 감독을 중심으로한 사역의 제도화의 시작이 나타나고 있지만, 목회 서신의 공동체는 여전히 가정 중심의 공동체이었다. 목회 서신이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묘사하고(딤전 3:15), 직분자의 자격을 말할 때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딤전 3:4-5, 12; 5:4), 그리고 그 서신 안에 oi\ko"와 그 동족어의 빈번한 출현(, 딤전 3:4, 5, 12, 15; 5:4, 8, 13, 14; 딤후 2:10; 1:7, 11)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집에서는 모이는 가정 교회는 2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생활을 지배하였다. 개인의 가정, 특별히 식당은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자기 인식에 부합하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모임 장소로서의 가정 선택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위해 다락방을 선택하신 것과 사역의 환경으로 세속적인 장소를 선택하신 것 그리고 믿는 자들 사이에 가족적인 유대를 강조하신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가정 중심의 초기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갈릴리 해변에서부터 로마 제국의 변방까지 신속하게 보급하였다. 112년 경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Pliny)는 트라얀(Trajan) 황제에게 기독교의 확산을 보고하면서, “이 미신의 전염성은 도시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마을과 농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논평하였다. 
그런데 2세기 중엽 이후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임 장소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가정 집을 개조하여 교회 모임 장소로만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 교회가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교인의 숫적 증가로 인한 자연적인 발전이었다. 베드로 행전이나 도마 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자기들의 집(특별히 식당)을 그리스도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장소로 개조하였다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Acts of Peter, 7-8, 19-20; Acts of Thomas, 131-133). 또한 Pseudo-Clementines 안에 있는 베드로 이야기는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자기 집을 교회로 바친 자로 묘사하고 있다(Recognitiones, X.71). 이 새로운 가정 교회 모임 장소 중의 하나가 1931/32년에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에서 발굴되었다. 이 건물은 두라-유로포스의 전형적인 주택이었는데, 안뜰과 8개의 내실이 있고, 내실 중의 둘은 하나의 큰 모임 장소로 변형되었다. 이 변형된 방의 크기는 5.15 x 12.9 미터로, 65-75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큰 내실이 생겨난 연대는 벽에 남아 있는 낙서로 보아 232/233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내실에는 세례용 물통이 있었고, 벽에는 여러가지 성화(선한 목자, 선악과 옆의 아담과 이브, 중풍 병자의 치료, 가라앉는 베드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다윗과 골리앗)로 장식되어 있었다. 
개조된 가정 집에서 모임을 가진 가정 교회는 3세기 말까지 여전히 중심을 이룬다. 261년 경 갈리에누스(Gallienus)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예배 장소들’을 교회 감독들에게 복구시켜 주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그 ‘예배 장소들’은 거의 틀림없이 개조된 가정 집들이었을 것이다. 화이트(White)는 그런 교회당이 어떤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잔존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3
세기 중엽 이후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개조된 가정 집과는 다른 별도의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다. 249년에 황제가 된 데시우스(Decius)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250년부터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251년 고트 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데시우스가 죽자 그의 친구 발레리안(Valerian)이 황제가 되어 전임자처럼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그도 곧 적군(페르시아인)에게 포로로 잡혀 갔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 260년 황제에 즉위하였다. 갈리에누스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산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면서 정책을 바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에 의하여 핍박이 재개되기까지 40년 간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 평화 시기에, 특별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여러 지역에 별도의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3세기 말에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 기금을 사용하여 모든 도시에 큰 교회를 건설하였다” 고 말한다. 이 말은 다소 과장된 것이 사실이지만, 콘스탄틴(Constantine) 이전에 아마도 일종의 바실리카(basilica)라고 할 수 있는 교회 건물들이 이미 존재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회 건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런 건물들 안에는 일반적으로 성직자의 자리와 평신도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교회가 개조된 가정 집이나 또는 다른 독립된 건물을 소유하고서부터 ‘교회(ejkklhsiva)’라는 용어가 건물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그 용어가 하나도 예외 없이 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 시대에는 독립적인 교회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Pseudo-Clementines Recognitiones(X.71)과 유세비우스의 교회사(VIII.1.5)가 대표적인 예이다. 심지어 유세비우스는 312년 두로(Tyre)에 세워진 교회당 봉헌 설교에서 그 교회당을 이스라엘의 성전에 비유하였다. 
313
년 콘스탄틴의 밀란 칙령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당 건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공인 당시 로마 제국 안의 그리스도인의 인구는 약 10% 정도로 추산되나, 그 수는 곧 크게 증가해 갔다. 4세기 초 콘스탄틴의 전임자 디오클레티안의 박해시대 동안의 교회당들의 파괴와 기독교 공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수적 증가로 인하여, 교회는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소위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직사각형 건물로, 한 지역의 교회 또는 대도시의 한 구역의 교회 전체를 포함하기에 충분한 큰 건물이었다. 바실리카는 3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들은 사각형 형태의 입구인 아트리움(atrium), 회중석(naves) 그리고 성직자의 좌석이 있는 성소(sanctuary)이다. 이런 교회당의 출현과 함께 교회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가족적인 가정 공동체의 교회 구조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예배 의식도 일부 궁중 의식을 받아 들여 더 장엄하고 더 고정화되고 더 제사장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의 삶은 많은 점에서 대규모적이었으나, 추상적이기도 하였다. 이제 친밀하고 가족적이고 실제적인 교회의 삶은 상실되었다. 


나가는 말 

가정 교회는 신약 성경 시대에 출현하여, 바울의 모든 교회의 예배와 삶을 지배하였고, 150년까지 기독교 신앙을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세기 중엽 이후 가정 교회는 조금씩 변화를 경험하였지만, 4세기초까지 가장 보편적인 교회 형태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밀란 칙령(313) 이후에 바실리카들이 세워지면서 가정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바실리카라는 교회 건물의 등장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심각한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건물로 이해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는데(고전 3:16; 고후 6:16),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복수(plural) 리더십과 리더십의 평등은 주교(bishop)를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 계급 제도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일종의 구약적 제사장 제도가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세째, 은사 중심의 사역이 사라지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바실리카 안에 있는 성소와 회중석의 구분은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네째, 예배는 모든 성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축제에서 성직자가 중심이 된 의식(ritual)으로 전환되고 평신도는 수동적인 관람객으로 전락되었다. 다섯째, 바울의 가정 교회에서 통합되었던 예배와 삶이 분리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에서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변질되었다. 여섯째, 주의 만찬(the Lord? Supper)이 애찬(love feast)에서 분리되어, 공동 식사가 아니라 제단 의식이 되었다. 일곱째, 공동체 안에서 은사를 통한 나눔은 없어지고, 이제 주교에게 나아오는 것과 그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례식에 참여하는 것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이해의 변화가 발생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덟째, 교회는 가족 공동체의 특성을 상실하고,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서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변화들과 함께, 성경에 나타난 원래 교회의 모습인 가정 교회는 이제 불법 모임으로 선언되었다. 예를 들면, 360년과 370년 사이 어떤 시점에서 열린 라오디게아(Laodicea) 회의는 가정 집에서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주교나 장로는 가정 집에서 성찬식을 행해서는 안된다” (Canon 58). 이것은 어떤 점에서 성경 이후에 생겨난 교회 전통이 성경을 정죄한 것이다. 물론, 신약 성경 이후 교회의 발전은 모두 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변화 속에서도 교회의 본질은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실, 바울은 교회 건물과 제도화된 성직자 계급이 없었어도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무엇이 결핍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회피할 수 없는 도전은, 새로운 교회 전통 속에서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하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