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멕시코목장을 목자로 섬기고 있는 황교희입니다.
저는 지난주 토요일 간증설교에서 이것으로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양회에 간증자로 뽑아주셔서 이 이야기를 많은 성도분들과 나누길 원하는 주님을 뜻으로 알고 다시 나누고자 이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신명기 12장 7절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계시는 그 앞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먹고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시고 즐거워한다”는 문장만 보아도 분명 올해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당신들이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신다”는 라는 말씀에 꽂혀 어린아이처럼 우리 목녀님에게 여러 번 이 구절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기도 하였고, 제 자동차 정 중앙에 이 말씀을 꽂아두어 틈틈히 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1월
2월
지난해 10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목녀의 차를 팔게 되습니다. 이후 차를 살 여력이 없어 약 4개월 동안 차가 없어 십자인대 수술을 받은 동생인 황교욱 목자님의 헌신으로 도움을 받아 지내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황 목자님이 다시 일을 하게 되면서 픽업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형편이 넉넉치 않아 정효선 목녀님은 2,000불짜리 차를 달라고 목장에서 기도제목을 내놓았습니다. 사실 우리 가족은 그 돈도 당장 없었습니다.
결국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 픽업 문제가 코 앞으로 닥쳐왔습니다. 그러던 중 수 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한 친구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되는 가운데, 그 친구로부터 “자신의 차량을 2,000에 살 사람이 있냐?”며 연락이 왔습니다. 카톡으로 사진까지 보내어 주었는데 저는 그것이 꼭 기도응답처럼 느껴졌습니다. 막상 기도했던 금액의 차를 찾게 되었지만 우리에겐 그에 해당하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 월 500불씩 4달에 걸쳐 지불해도 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언젠가부턴 하나님이 일하시면 어느 일도 순탄하게 처리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있게 물었습니다. 역시나 친구는 흔쾌히 동의를 해주어 차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타고 있어 감사합니다. 그 차량을 정비해주신 백호철 형제님께서는 지금 제가 타고 있는 것 보다 더 오래 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웃으며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3월
모두들 기억하고 계시 듯 우리교회는 부흥회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담당자였던 저는 몇 주 전부터 일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부흥회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이틀을 앞두고 회사에서 맺고 있던 스트라타 일 중 가장 큰 계약이 1/3가량 축소되어야 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연락을 받고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문제의 반응을 보신다’는 하나님을 믿고 원망하지 않고 부흥회를 성심성의껏 마치고자 이를 꽉 깨물고 애써 떨치려 노력했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호주에도 본격적으로 롹다운이 시행되면서 불안감이 증폭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는 2명이 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계약도 축소되었던 터라 집 세라도 줄여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명의 쉐어생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일자리가 끊긴 워홀 친구들이 식사를 거르고, 더 어려운 경우에는 집 세를 내지 못해 노숙을 한다는 이들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 한 편에 ‘그들을 위해 김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녀님과 상의하여 저희 방까지 내어주기로 했습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아래층 거실에 임시 거쳐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매 주 김밥을 만들거나 어려운 이들을 돕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한국에 들어가기 전 3주 동안 임시숙소를 찾던 여학생을 쉐어생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돈으로 김밥 50줄과 생수 50개를 준비해 스트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의 과거를 아시는 분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개인주의자였고 저와 저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차 있던 몹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코로나가 한 창인 이때 이러한 일을 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당시에 얼마나 제 인생일 행복하고 의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셨던 감사했던 3월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이 줄거나 일을 할 수 없는 사업체에 정부에서 보조를 해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회계사는 그 조건이 3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30% 줄어든 매출이 기준이라 말했습니다. 기억 나시죠? 3월 부흥회 앞두고 있었던 일. 결국 그 계약이 축소된 덕분에 전년 대비 회사 매출이 딱 그 정도 감소되어 4번에 걸쳐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냥 우연으로 넘기기엔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에 벌어진 일이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코비드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걱정만 하였다면 절대 할 수 없었던 제 인생에도 언젠가부턴 마태복음 6:33절 말씀이 확실한 믿음으로 인생이 바뀌어 있어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5월
새벽기도를 통해 내 자신이 죄인 임을 알게 해주심에 감사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말씀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남을 비판하고 정제하는 마음이 커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벽기도에서 읽게된 로마서를 통해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보는 자”가 제 자신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후에는 시간을 두고
교회 성도분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그 분들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6-7월
코로나로 락다운이 된 이후부터 줄 곧 기도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과 같은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애굽땅으로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이 7년 기근을 앞두고 지혜를 발휘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던 그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6월 새벽기도를 통해 전도서 11장 1절 말씀에서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마치 지금 시대의 이야기로 들려왔고 그 말씀을 활용하였더니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경제관념을 주님께서 한 단계 더 높여주신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이 이익을 개인적인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사용해야 함을 어떤 계기를 통해 알려주셔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다시 예전처럼 내 가족만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으로 돌아갔을 것 같습니다.
8월
동생과 함께 다시 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일년 넘게 같이 일 하지 못해 초원모임에서도 기도제목으로 올렸던 찬라였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동생과 함께 일 하는 것을 원하신 듯 근무지역과 직원 등 저의 주변 환경을 차례대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일이 진행되지 못했는데 새벽기도 때 ‘제가 계약한 금액을 그대로 주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어떻게 일궈놓은 일과 계약들인데..”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아직도 나는 지금의 일들이 나의 노력으로 생긴 것인가?’라고 회개하며 떠올려 주신 것에 무작정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동생인 황교욱 목자님과 함께 다시 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겨 이후 목녀와 저는 각각 자신의 VIP 2명과 행복의 길을 시작하게 되어 영혼구원하는 일에 삶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9월 -10월
7개월 동안 코로나로 잃었던 양을 되찾는 경험을 하게되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1월에 침례를 받았던 정순영 형제가 코로나로 목장과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롹다운이 풀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형제가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나 목장과 교회 출석을 권했지만 이후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아닌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몇 주 후 정말로 그 형제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해 연락이 먼저 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어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왔고, 목장과 교회 출석을 권면하였더니 그렇게 하기로 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 간정한 기도와 내려 놓음으로 다시 찾게 되는 경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 버린 양을 찾은 기쁨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주셨던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11월
멕시코목장 다섯번째로 최유정 자매님이 침례 받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영접 후 1년 가까이 침례를 미루었던 터여서 저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뜩 저희 목녀님이 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해볼까? 하고 그날부터 바꿔보았습니다. 정 목녀님의 기도 방식이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을 주어 당사자로부터 직접 그 말을 하게 해달라.’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정말 얼마지나지 않아 정 형제님이 돌아오는 일과 맞물려 최 자매님이 “그 형제님이 목장에 돌아오면 침례를 받겠다.”고 스스로 말하는 일이 목장에서 벌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정 목녀님과 반대로 접근하였습니다. 어려움이나 문제 해결을 바라는 목장식구들이 있으면 제가 받은 은혜의 경험이나 성경말씀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로 인해 실족한 목장식구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공개적으로 회개합니다.
하지만 정 목녀님은 목장식구들은 물론이고 저에게도 한결 같이 말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라~ 성경에 나온 것처럼 저렇게 해봐라~”식의 조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중보는 결국 저에게 깨달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되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운전을 하면서, 누구를 만나면서 등 여러가지 통로로 하나님 아버지께선 저를 움직이고 변화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언제가부터 제 마음 속에는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정 목녀를 우리집의 영적 리더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 목녀님은 그것을 누리지 않고 “우리집의 가장은 바로 당신.”이라며 저에게 가족의 리더로서 세워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나를 위한 격려의 말로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말씀에 기초해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24절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아듯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
24절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정 목녀가 보기에 제가 부족하여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저를 그렇게 대해주고 말하여주고 기도해 준 것입니다. 이를 보니 저는 더욱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제가 우리집 리더이지만, 제 마음 속에는 정 목녀님이 우리집의 영적 리더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게 된 것 같습니다.
12월
하나님을 통해 받은 은혜를 수정교회에서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돌아온 나병환자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치유 받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 모두 다 말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간증을 통해 저를 더욱 자유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니평세를 기회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수정교회 평세 등록을 할때만 해도 그 교회에 가서 정탐꾼으로 이것저것 몰래 보고 정보를 모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교회에서 10명을 섬기며 직접 해 보라는 듯이 상황과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부족함을 교훈 삼아 내년 우리교회 평세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제가 기대하며 기도했던 것 이상으로 큰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읽고자 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계시는 그 앞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혈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가족, 목장식구들, 그리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